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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영자 2008-01-08 12:10:11 | 조회 : 4341
제      목  의미와 콘텍스트(J. 탈리 지음, 유종선 옮김) 1999-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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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와 콘텍스트 (Meaning and Context)  =>"본문보기&구매하기"
저자 : Tully, James
옮긴이 : 유종선
ISBN : 89-88791-31-2
양장 1999-08-30
638 페이지 25,000원


▶지은이/옮긴이 소개

지은이
제임스 탈리
영국 맥길 대학 정치학 및 철학 교수

옮긴이
유종선  
서울대학교 외교학과 졸업
미국 존스 홉킨스대학 철학박사
현재 울산대학교 사회과학부 교수(정치학 전공)
논저 [신국제질서의 도전과 대응](공저) [조선시대 개혁사상연구](공저) [미국사 100장면] 외


▶책의 내용

* 1978년 퀜틴 스키너는 37세의 나이에 영예로운 케임브리지 대학의 정치학 교수에 선임되었다. 그의 임명은 상호 연관된 두 학문 분야, 곧 역사학·사회과학·문학비평의 방법론 분야와 그가 자신의 독창적 방법들을 현대 정치철학과 정치사상 및 행위의 역사 연구에 응용한 분야에서의 그의 공헌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그는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시대 정치사상을 다룬 [근대정치사상의 기초 The Foundations of Modern Political Thought]를 출판하고 옥스퍼드 저명 사상가 시리즈의 마키아벨리 부분을 집필하였다. 또한 철학과 역사의 관계를 다룬 논문들을 묶은 [역사에서의 철학 Philosophy in history]을 공동편집하는 한편 이 편저를 시작으로 그가 편집한 지식사 단행본 시리즈를 [콘텍스트에 비추어 본 사상 Ideas in Context]이라는 제목으로 연간하였다.

* 퀜틴 스키너의 사상은 여러 분야의 학자들로부터 많은 찬사와 날카로운 비판을 동시에 받아왔다. 그의 연구업적들이 폭넓은 분야에 걸쳐있기 때문에 그에 대한 비판론들은 사회과학, 정치철학, 그리고 정치사상사의 첨단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이 책 [의미와 콘텍스트]는 '사상사란 무엇인가?', '우리는 왜 사상사를 연구하는가?', '사상사는 어떠한 방법과 문체로 기술되어야 하는가?' 라는 사상사 연구의 본질적인 질문들에 대한 퀜틴 스키너와 비판자들 간의 논쟁 및 대화를 묶은 것이다.

* 스키너는 과거의 사상을 역사적 행위로, 저술의 역사적 의미의 회복을 사상사 연구의 주된 목적으로 제시한다. 또한 비트겐슈타인과 오스틴의 언어철학에 의지하여 언어생활의 일방적 규칙들로부터 사상의 역사적 의미를 발굴하는 여러 방법들을 제시한다. 이에 맞서 그의 비판자들은 사상사 연구에서 현재의 목적과 관심이 가지는 압도적 중요성을 강조하고, 사상사 연구의 특별한 방법이란 있을 수 없으며 스키너의 방법론은 오히려 연구의 혼란을 가져올 뿐이라고 주장한다.

* 이처럼 이 책은 일차적으로 사상사, 특히 정치사상사 연구의 방법론적 논쟁이다. 그러나 '방법'을 논하면서 스키너와 그의 비판자들은 역사와 사상사의 현재적 의미에 관해 고도의 철학적인, 그러나 흥미진진한 논쟁속으로 우리를 이끈다. 양 진영의 열정적인 주장을 들으면서 우리는 비단 방법론적 교훈뿐 아니라, 그 동안 우리가 얼마나 학문과 우리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자기성찰 없이 사상사라는 학문에 습관적으로 매달려 왔는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

* 다른 역사와 마찬가지로 사상사 또한 진지한 역사의식 없이는 이른바 역사의 빈곤에서 벗어날 수 없다. 스키너와 그의 비판자들 사이에서 우리가 어느 입장을 취하는가도 중요하지만, 그들이 제기하는 문제의식을 도외시한 채 사상의 역사가 우리에게 의미있게 다가올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점에서 이 책은 사상사와 이를 연구하는 우리 자신에 대해 중요한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해 줄 것이다.


▶목차

제1부  서론
  들어가는 말
  제1장  펜은 힘센 칼이다 : 퀜틴 스키너의 정치분석 - 제임스 탈리

제2부  퀜틴 스키너의 해석이론
  제2장  사상사에서의 의미와 이해
  제3장  동기·의도·해석
  제4장  '사회적 의미'와 사회적 행위의 설명
  제5장  정치사상과 정치행위 분석에서의 몇 가지 문제
  제6장  언어와 사회변동

제3부  비판
  제7장  꽃으로 말하세요 - 마틴 홀리스
  제8장  발언수행적 기술은 행위를 설명할 수 있는가 - 키스 그레이엄
  제9장  사상사 연구의 '수정주의적' 방법에 대한 한 역사주의자의 비판 - 조지프 페미아
  제10장 지식사 연구의 방법에 대하여 : 퀜틴 스키너의 [근대정치사상의 기초]
         - 케네스 미노그
  제11장 퀜틴 스키너의 방법과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 네이선 타코브
  제12장 역사철학의 남은 테제들 - 존 카인
  제13장 갈등의 해석학 - 찰스 테일러

제4부  후기
  제14장  나의 비판자들에 대한 답변


▶미리보기

들어가는 말

1978년, 퀜틴 스키너 Quentin Skinner는 37세의 나이로 케임브리지 대학 정치학 정교수직에 선임되었다. 이 명예로운 지위에 그가 임명된 것은 상호 연관된 두 학문 분야에서의 그의 공헌이 공식적으로 어느 정도 인정받게 되었음을 뜻한다. 하나는 역사학·사회과학·문학비평의 방법론 분야이고, 다른 하나는 그가 자신의 독창적 방법들을 현대 정치철학과 정치사상 및 행위의 역사 연구에 응용한 분야이다. 이 분야들에서의 그의 학문적 업적은 의미철학의 많은 연구들을 통해 지지를 얻고 있다. 1978년 출판된 그의 {근대 정치사상의 기초 The Foundations of Modern Political Thought}는 두 권으로 된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시대 정치사상에 관한 연구이다. 1978년 이후로도 그는 옥스퍼드 저명 사상가 시리즈의 마키아벨리 부분을 집필하는 한편, 철학과 역사의 관계를 다룬 논문들을 묶은 {역사에서의 철학 Philosophy in History}(1984)을 공동 편집하고 여기에 자신의 논문을 기고하는 등, 이 분야들에서 학문적 공헌을 계속해 오고 있다. 이 편저를 시작으로 그가 편집한 지식사 단행본 시리즈가 {콘텍스트에 비추어 본 사상Ideas in Context}①이라는)제목으로 연간되었다. 그 밖에도 다수의 연구업적이 출판되었다. 그의 학문의 넓이와 깊이는 이 책 마지막 부분에 실린 그의 주요 연구업적 목록을 일별하면 알 수 있을 것이다.
퀜틴 스키너의 사상은 여러 분야의 많은 학자들로부터 대단한 찬사와 더불어 날카로운 비판의 대상이 되어 왔다. 그의 연구에 대한 여러 비판은 대체로 수준이 매우 높으며, 그의 연구 업적들이 폭넓은 분야에 걸쳐 있고 그 중요성이 크기 때문에 그에 대한 비판론들은 사회과학철학, 정치철학, 그리고 정치사상사의 첨단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따라서 학자와 학생들 모두를 위해 스키너의 대표적 이론들과, 그의 연구에 대한 가장 비판적이고 철저하며 광범위한 반론들, 그리고 비판자들에 대한 스키너의 답변 ― 이 답변의 과정에서 그는 자신의 원래 견해들을 수정하기도 하고 지금 자신이 어떤 연구를 하고 있는지 그 대강을 그려보기도 한다 ― 을 한데 묶어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겨졌다. 그 결과가 바로 이 책 {의미와 콘텍스트 Meaning and Context}이다.
이 책을 편집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것은 비판적 논문들을 선정하는 작업이었다. 좋은 논문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이를 적당히 추려내는 일이 쉽지가 않았다. 그래서 스키너의 작업에 가장 예리하게 도전하면서 전체적으로는 광범위한 정치철학적 관점들을 대변할 수 있는 논문들을 선정 대상으로 삼았다. 통상적인 인문학 논문집과 달리 이 책은 특정 학파에 속하는 이들의 공동작업의 결과가 아니다. 오히려 주요 학파들간의 충돌이자 경합이며 각 학파의 '시론' 또는 '시도'들을 한 데 엮은 것이다. 이 책은 그런 점에서 더욱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날카로운 비판에 직면하여 스키너는 어쩔 수 없이 결론의 글에서 자신의 생각이 과연 옳았는지를 곰곰이 되돌아볼 수밖에 없었으며, 그의 이같은 반추가 ― 희망하건대 ― 독자로 하여금 이 중요한 문제들에 대해 스스로 생각해 보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펜은 힘센 칼이다'라는 제목의 첫 번째 글은 스키너의 방법론에 대한 서론적 개관인 동시에 그의 주저인 {근대 정치사상의 기초}로부터 근대 정치사상의 본질에 관한 세 가지 주요 테마를 끄집어내 보고자 하는 시도이다.
이어 제2부에는 방법론에 관한 스키너 자신의 논문 5편이 수록되어 있다. [사상사에서의 의미와 이해]라는 논문은 해석과 이해의 문제에서 기존의 접근법들이 가지는 결함에 대한 그의 최초의 체계적 논의이다. 이 글에서 그는 먼저 최근 사상사의 학문적 경향에 대해 매우 치밀하고 파괴력 있는 비판을 제기한다. 다음으로 그는 자신의 대안, 곧 저술의 이해를 위해서는 이를 복합적인 언어행위로 보아야 하고 따라서 이를 저술하는 데 저자가 하고 있었던 행위, 이른바 그가 말하는 저술의 '요점' 또는 '힘'을 복구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저술을 관습에 지배되는 이의 언어적 콘텍스트에 위치시킬 필요가 있다는 자신의 접근법을 제시한다. 나아가 그는 마지막으로 이러한 형태의 연구는 우리 자신을 아는 데 요점이 있다는 주장을 편다.
뒤이은 4편의 글들은 이러한 선언을 정교하게 다듬고 확대하며 수정한다. 이 책 끝 부분의 참고문헌에는 그의 이같은 접근법을 구체적 사례들에 적용하여 이의 타당성을 논증한 다수의 논문들이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여기에 더하여 스키너의 접근법이 가지는 폭, 효용성 그리고 가치를 충분히 평가하려면 독자들은 {근대정치사상의 기초}에서 그가 이를 어떻게 적용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만 할 것이다.
이제 그를 비판한 글들에서 제기된 몇 가지 문제들에 대해 불충분하나마 간단히 기술해보기로 한다. 물론 각 논문은 여기에서 간단히 기술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한 내용들을 담고 있다. 첫 비판자는 마틴 홀리스 Martin Hollis이다. 그의 질문은 스키너가 과연 동기에 관한 설명을 회피할 수 있는지, 또는 그의 접근법이 저자의 어떤 동기 같은 것을 전제하고 있지 않은지 하는 것이다. 나아가 그는 연구대상인 다른 신념들의 합리성에 대해 스키너가 좀더 명쾌한 태도를 표명해야만 하는 것은 아닌지, 그리고 자기가 가진 여러 신념과 가정에 대해서도 스키너 스스로 다시 생각해 보아야만 하는 것은 아닌지를 묻고 있다. (이는 찰스 테일러 Charles Taylor에 의해서도 제기된 바 있는 질문이다.)
키스 그레이엄 Keith Graham의 논문 [발언수행적② 기술은)행위를 설명할 수 있는가?] 또한 홀리스의 글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 글에서 그가 묻고 있는 것은 첫째, 발언수행적)힘 illocutionary force③과 행위자의 행위의도를 동일시할 수 있는지의 여부, 그리고 행위를 이의 발언수행적 힘이라는 차원으로 재기술하는 것이 스키너가 주장하는 것처럼 그 자체로 사회적 설명의 한 형태를 구성하는지의 여부이다. 조지프 페미아 Joseph Femia는 주로 스키너의 [의미와 이해]라는 논문에 초점을 맞추어 저자의 의도라는 차원에서의 설명은 역사적 설명의 형태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오히려 이는 과거로부터 우리가 뭔가 가치있는 것을 배우는 데 방해가 될뿐더러 특히 그람시의 저작들에서 보여지는 역사주의의 전통과도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아가 그는 과거를 이용하여 현재의 정치에 대해 생각하려면 우리는 스키너가 비판하는 바로 그러한 접근법들을 채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한다.
케네스 미노그 Kenneth Minogue는 스키너의 접근법이 실제 얼마나 성공을 거두었는지를 그의 {근대 정치사상의 기초}를 통하여 검증하고자 한다. 그는 스키너의 접근법이 과연 대단한 효용성을 발휘했는지를 묻고, 정치사상사가는 언어행위 이론의 제한에서 벗어나는 것이 차라리 낫다는 주장을 편다. 심지어 그는 스키너의 방법이 '해롭다'고까지 말한다. 그의 주장의 요점은 정치철학자의 과제와 정치사상사가의 과제가 서로 다름을 주장하려는 것이다. 스키너는 이같은 구분에 의문을 표시하지만, 아무튼 페미아는 정치철학자들이 분석 평가하는 사상의 독립적이고 보편적인 차원과 역사가들이 분석하는 사상의 역사적이고 상황적인 차원은 서로 다르다는 점을 그의 주장의 근거로 내세운다. 이와 같이 그는 페미아의 주장을 보충하면서도 그와는 다른 시각에서 스키너의 방법이 정치철학의 고전들을 연구하는 한 가지 정당한 방법의 문을 닫아버린다는 주장을 편다. 이어지는 네이선 타코브Nathan Tarcov의 논문 또한 스키너의 방법을 그의 {근대 정치사상의 기초}에 비추어 평가하고 있다. 그는 같은 책 제1권의 몇 장에서 스키너가 마키아벨리를 어떻게 잘못 해석하고 있는지를 면밀히 살펴보면 그의 접근법이 가지는 문제점들을 가장 선명히 볼 수 있다고 주장한다.
마지막에서 두 번째에 수록된 존 키인 John Keane의 논문에는 스키너에 대한 세 가지 주요 비판이 전개되고 있다. 첫째, 스키너는 저술을 이해한다는 것은 곧 저자의 저술의도를 이해하는 것과 같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저술이 씌어진 언어의 '생산성'을 무시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둘째, 스키너적 접근법의 중심개념, 곧 비규범적이고 서술적인 '개관 survey'이라는)개념은④ (비트겐슈타인 Wittgenstein과 푸코 Foucault에도 비슷한 개념이 있다는 점이 반드시 지적되어야 한다.) 의미를 그대로 재현한다는 낡은 실증주의적 또는 재생주의적 오류에 기초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는 이 개념이 해석자와 저자간 협상의 대화 또는 지평의 합일이라는 개념으로 ― 이는 본래 성서 해석학으로부터 발전된 개념이다 ― 대치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셋째, 키인은 스키너의 방법이 현실의 권력과 이익관계를 비판하지 않고 이를 강화하는 경향이 있다고 비판한다. 장 프랑수아 리요타르 Jean- Francois Lyotard의 연구를 응용하여 그는 복수적 관점에 의한 과거의 기술을 이의 치유책으로 제시한다.
[갈등의 해석학]이라는 제목의 테일러의 논문은 나의 서론적 논문 [펜은 힘센 칼이다]의 초판본을 검토하는 방식으로 스키너의 연구업적을 논하고 있다. (이 책에 수록된 나의 논문은 테일러의 유용한 언급들에 비추어 초판을 수정한 것이다.) 그의 질문의 요지는 스키너가 과연 자신이 연구하는 정치이론들의 사실성이나 타당성의 문제에 대해 객관적 태도를 견지하면서 이에 개입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또는 좀더 따지는 식으로 말한다면, 과연 스키너가 자신의 개관적 역사기술을 어떤 초연한 것으로서 의미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내가 1장에서 한 것처럼 그도 스키너, 비트겐슈타인, 푸코의 개관적 접근방법의 장점들을 가다머 Gadamer와 그 자신의 대화적 접근방법에 비추어 검토하고 있다. 논문의 후반부에서 테일러는 내가 {근대 정치사상의 기초}로부터 끄집어낸 한 가지 가설, 곧 정치적 갈등과 전쟁이야말로 근대 초기 여러 정치 이데올로기들의 지배적 위치로의 부상과 이의 지속을 설명하는 주요한 요소가 된다는 가설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이 책의 마지막 부분은 그의 접근법과 이의 적용 방식을 이처럼 강력히 비판하는 것에 대한 스키너의 답변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는 비판자들이 제기하는 질문들에 답하고 그들의 오해를 밝히며, 설명하고 변호하고 자신의 의견을 수정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그는 자신의 답변을 두 가지 콘텍스트, 곧 의미와 콘텍스트를 어떻게 설명하고 이해할 것인지에 관한 이 책에서의 논의와, 인문과학 전반에 걸친 보다 광범위한 논의의 콘텍스트에 주의깊게 위치시킨다. 그는 자신이 어디에서 이 복잡한 논의들의 관습들을 따르고 있고 어디에서 이러한 관습들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독창적 주장을 펼치고 있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럼으로써 그는 우리가 벌이고 있는 이 20세기 후반의 논쟁이 무엇인지, 또한 그가 왜 이 논쟁에 끼여들어 글을 쓰고 있는지를 우리가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준다. 그는 바로 이같은 재귀적(再歸的) 방식의 답변을 통해 ― 다시 말해 자신의 접근법의 의미와 콘텍스트를 설명하기 위해 바로 자신이 내세운 접근법을 사용함으로써 ― 사상과 행위의 의미 그리고 이의 콘텍스트를 연구하는 자신의 방법을 예시하면서 동시에 이를 변호하고 있다.


옮긴이의 말

역사로서의 정치사상사 - 스키너와 포칵의 정치사상사 연구방법에 대한 비판적 고찰

1  문제의 제기
일반적으로 정치철학에서 정치사상사 연구는 필수불가결한 요소로 인식되고 있다. 극단적 분석철학의 입장에 서지 않는 한 정치철학자는 그의 논의에서 과거 위대한 정치사상가들의 견해를 인용한다. 정치철학자가 과거의 정치사상에 관심을 갖는 가장 큰 이유는 그의 정치철학적 주제에 대해 과거 위대한 사상가들로부터 어떤 시사나 도움을 얻기 위함일 것이다. 다시 말해 정치철학자는 정치에 대해 같은 철학적 질문들을 던졌던 과거의 위대한 사상가들을 현재에 되살려, 그들과의 상호비판적 대화를 통해 자신의 질문에 대한 보편타당한 해답을 얻고자 한다.
좀 단순화된 느낌이 있지만 정치사상사 연구의 목적과 본질에 대한 이같은 이미지는 지금까지의 정치사상사 연구의 전통에 비추어 사실에서 크게 벗어난 것이 아니다. 정치사상사라는 학문 분야가 이러한 목적에서 출발하였고 아직도 많은 정치사상사가들은 ― 특히 한국 학계의 경우 ― 이러한 전제에 별다른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아마 앞으로도, 정치사상사가 정치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주제를 다루는 한, 정치사상사 연구에서 어떤 현실적이고 현재적인 의도와 목적을 전혀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과거의' 위인들로부터 '현재의' 정치철학적 문제들에 대해 배우고 시사를 얻기 위함이 정치사상사 연구의 압도적인 이유라 하더라도, 그것이 "가능하게 되는 조건들")에 대해서는 좀더 철학적이고 역사학적인 차원에서의 고찰이 필요하지 않을까? 나아가 정치사상사 연구에 현실적·현재적·철학적인 것 외에 다른 의미나 목적을 부여할 수는 없는 것인가? 일반적인 역사의 연구에서도 그렇지만 현재적이고 철학적인 관심이 정치사상사의 왜곡과 빈곤을 초래할 위험은 없는 것일까?
서구 학계에서 정치사상사 연구의 목적과 본질, 방법에 대한 이러한 비판적 질문들은 이미 1950년대부터 폭넓게 제기되어 이에 대한 학문적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어 왔다. 1980년대 들어 목격되는 정치사

상사 연구의 '혁명')도 사실은 이처럼 수십 년에 걸친 학문적 논의의 과정을 통해 그 씨앗이 배태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서구 학계에서 정치사상사 연구는 이의 본질에 대한 인식 및 기술의 양식과 언어에서 근본적인 변화를 겪고 있다.
사실 이러한 비판적 질문들은 정치사상사 기술의 서구 학계적 전통을 맹목적으로 추구해 온 우리에 의해 먼저 제기되었어야 옳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간 우리 학계에서 이러한 논의가 전무했을 뿐만 아니라 서구 학계의 논의조차도 제대로 알고 따라가지 못했던 것은 한마디로 정치사상사의 학문적 정체 identity에 대한 우리의 자기비판적 성찰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한국적 정치상황에 의해 부여된 어떤 급박한 현실적 요구들이 정치학자들로 하여금 이런 한가하고 순수학문적으로만 보이는 관심으로부터 눈을 돌리게 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이 '한가한' 관심일 수만은 없다. 정치사상사가 무엇이고 이를 왜, 어떻게 연구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들이 제기되고 이에 대한 나름대로의 답이 주어지지 않는 한 우리의 정치사상사적 논의, 그리고 이에서 파생되는 정치철학적 논의들은 아마도 의미와 적실성을 가질 수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우리 학계에서 아직까지도 이러한 기본적인 질문들이 충분히 논의되지 않고 있으며, 이것이 오늘날 정치사상사에 대한 학문적 관심의 퇴조 내지는 방향 상실을 초래하였다고 믿는다. 이런 상황에서 이른바 정치사상사 연구의 역사적 방법론을 선두에 서서 주창한 퀜틴 스키너 Quentin Skinner의 학문적 업적을 다룬 이 책이 번역 소개되는 것은 우리의 입장에서 정치사상사의 학문적 정체성을 세우려는 노력의 중요한 출발점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이 책의 여러 글들에 퀜틴 스키너 자신의 이론과 이에 대한 여러 입장에서의 비판이 자세히 논구되고 있으므로 이 글에서 이를 다시 자세히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정치사상사 연구에 그의 방법론이 등장하게 된  학문적 배경과 의의를 간단히 언급하고, 그와 함께 이 새로운 방법론을 대표하는 존 포칵 J. G. A. Pocock과 그의 방법론적 입장 차이를 규정하여 스키너의 입장을 좀더 명확히 드러내 보일 것이다. 그런 다음 특히 우리의 입장에서 스키너의 방법론에 대해 제기될 수 있는 비판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방법론이 우리의 정치사상사 연구에 어떤 중요한 시사를 하고 있는지를 나름대로 기술해 보고자 한다.

2  철학으로서의 정치사상사, 그리고 이의 정치철학적 근거
오늘날 대학 교과과정에서 정치학의 한 분야로 확립되어 있는 정치사상사 연구는 그 기원을 대체로 19세기 유럽의 학문적 풍토에서 찾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당시 유럽에서는 헤겔류의 관념적 역사철학과, 이의 영향으로 보편적 역사정신을 탐구하는 통시대적 철학사의 기술이 학자들간에 일대 유행을 이루었으며, 이러한 큰 테두리 안에서 일부 학자들이 정치사상사라고 하는 정신사의 한 특수분야를 기술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1900년을 전후하여 유럽과 미국의 각 대학에서 이 분야에 대한 학문적 수요가 급증하면서 정치사상사는 대학 정치학 강좌의 중심분야로 자리잡게 된다. 오늘날 정치사상사 연구에서 주로 취급되는 사상가와 그들의 저술, 그리고 그들의 정치사상에 대한 기술양식의 전형은 이 시기에 확립된 것으로, 지금도 정치사상사의 모범적 교과서로 널리 읽히는 세이빈 George H. Sabine의 {정치사상사 A History of Political Theory}(1937)는 이러한 초기 정치사상사 연구의 전통을 대표하는 저술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를 정치사상사 연구의 제1기라 부를 수 있다면, 1기의 학문적 특징을 혹자는 '그 주제가 다분히 철학적이고, 방법은 사이비 역사적 quasi-historical이며, 의도는 매우 현실적이었다'는 말로 요약하고 있다.) 주제가 철학적이라고 하는 것은 정치사상사가 정치철학의 주요 주제들에 따라 기술되었음을 뜻한다.

여기서 정치철학은 현대 정치철학을 말하고, 현대 정치철학의 주제들을 따라 정치사상사를 기술했다는 것은 곧 이러한 주제들의 역사적 보편성 timelessness이 전제되어 있음을 뜻한다. 물론 이것은 현대 정치철학이 기초하고 있는 분석철학적 인식론의 토대에서 비롯된 것이다. 분석철학의 입장에서 국가, 주권, 정치권력, 지배와 복종 등의 정치철학적 개념들은 시공을 초월하는 어떤 실체와 본질을 가지며, 정치사상사는 곧 이러한 정치적 실체들에 대한 철학적 언급의 역사로서 이해된다.
물론 이러한 정치적 실체들이 다른 사회현상적 실체들로부터, 또한 그 안에서 서로 명확하게 구분되고 범주화된 것은 오직 현대 정치철학에 이르러서이며, 이전에는 정치철학이 다른 사상의 영역과 어지럽게 뒤섞이고 개념적으로도 일종의 혼돈상태에 있었다고 본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조직적인 철학적 사고의 체계가 아직 미비했던 이유도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각 정치철학자가 처했던 역사적 상황이 그로 하여금 정치적 실체들을 명확히 인식하고 이에 대한 체계적 사고를 어렵게 했던 이유도 있다. 그러므로 과거의 정치사상을 기술하기 위해서는 이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상황적이고 역사적인 요소들을 해체하는 작업이 필수적이라고 보았으며, 따라서 이 시기의 정치사상사 기술은 과거의 정치사상을 역사로부터 떼어내어 보편타당한 어떤 것으로 만드는 것, 곧 "역사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시도")였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전통적 정치사상사 연구가 현실적 practical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현재의 정치적 질문들에 대한 직접적 답변을 과거의 정치사상으로부터 구하려 했다는 뜻이 될 것이다. 물론 이것이 가능하고 적실성을 갖기 위해서는 '현재'와 '과거'의 정치적 문제들이 끊임없는 추상화의 과정을 통해 어떤 보편적인 문제들로 환원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오직 철학적 사고를 통해서만 가능하며, 정치사상사 연구의 주제가 철학적이지 않으면 안 될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전통적 사가의 입장에서 볼 때 과거의 정치사상을 연구하는 것은 과거의 정치사상가들을 "우리 가운데 한 사람" "동료 시민" "같은 학문적 종사자"로 만들고, 궁극적으로 과거와 현재의 모든 정치철학자들을 이성적 대화가 가능한 초역사적 장으로 초대하는 의미가 있다.
이러한 입장을 전형적으로 따르고 있는 예로서 이 책에서도 자주 이름이 거론되는 리오 스트라우스 Leo Strauss를 중심으로 한 시카고 학파를 들 수 있다. 이들이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스트라우스의 정치사상사에의 관심은 그가 진단하는 바 유태인 문제로 대표되는 "현대 서구문명의 위기"에서 비롯되었다.) 이러한 위기는 "근대 정치철학의 가장 근저에 자리잡은 기본전제", 곧 평등과 자유를 가장한 정치적 획일주의에 기원하는 것이고,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은 오직 과거의 정치사상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스트라우스는 특히 고대 그리스의 건강한 공화주의가 현대 서구의 위기에 해답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고, 고대 그리스인들이 정치적 가치와 제도의 문제에서 현대인들과는 다른 어떤 대안들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고찰해 보기로 하였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의 정치사상이 현재에 적실성을 가지기 위해서는 이것이 현재에도 적용될 수 있는 어떤 보편적 정치문제들에 대한 언급이어야만 할 것이다. 다행히 고대 그리스의 ― 사실은 모든 시대의 ― 정치철학은 이의 특수한 역사적 상황, 특히 그것과 연계된 정치적 상황이 소멸했다는 이유만으로 타당성이 소멸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각 정치적 상황은 모든 정치적 상황에 핵심적인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어떻게 다양한 정치적 상황들을 "정치적 상황들"이라는 말로 부를 수 있겠는가? …… 고대 (그리스) 정치철학의 중심대상이었던 도시국가가 오늘날 근대국가로 대치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고전 정치철학의 타당성이 사라졌다고 믿는 것은 잘못이다.)

스트라우스에 따르면 정치사상사가가 아리스토텔레스의 국가론에서 얻고자 하는 것은 그가 살았던 도시국가가 아닌 국가 ― 근대 민족국가 역시 국가라는 실체의 한 역사적 현상에 불과하다 ― 라는 보편적 개념에 대한 철학적 암시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그의 도시국가를 통하여 보편적인 국가의 이데아를 말하려 했던 것으로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처럼 스트라우스는 과거의 정치사상을 이의 보편적인― 따라서 현재적인 ― 타당성이라는 차원에서 다룬다. 이런 점에서 '정치사상사 연구는 역사학이 아닌 철학')이라고 한 그의 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3  정치언어의 시공적 특수성과 역사로서의 정치사상사
오랫동안 정치학의 핵심영역으로 군림해 왔던 '철학으로서의 정치사상사'는 1950년대 영미 정치학계에서 내외의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먼저 정치학의 과학화를 외치는 일군의 행태주의자들 behavioralists의 도전이 있었다. 이들은 모델구축 modeling·이론화·계량화의 기치를 내걸고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정치에 대한 어떤 사변적·역사적 가설도 진리로서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물론 이들이 역사적이고 철학적인 접근법 자체를 송두리째 부정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기껏해야 과학적 검증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가설들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을 뿐이었다. 행태주의가 60년대에 학계를 풍미하면서 정치사상사와 정치철학은 특히 미국 정치학계에서 급격히 위치가 약화되었으며, 아직도 행태주의적 방법론을 고수하는 미국 대부분의 대학에서 정치철학과 정치사상사는 정치학 교과과정에서 아예 자취를 감추었거나 먼 주변부를 맴돌고 있을 뿐이다.
전통적 정치사상사에의 또 다른 도전은 정치학자들이 아닌 역사학자들로부터 제기되었다. 포칵, 던 John Dunn, 퀜틴 스키너를 중심으로 하는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 출신의 일군의 역사학자들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의 전통적 정치사상사 연구에 대한 비판, 이들이 제시한 정치사상사 연구의 새로운 철학과 방법, 그리고 이에 따른 서구 정치사상사의 새로운 해석은 정치철학과 정치사상사 학계에 커다란 논쟁을 불러일으키면서, 행태주의의 도전으로 침체에 빠진 이 분야의 학문적 관심을 다시 고조시켰다.
전통적 정치사상사 연구에 대한 이들의 비판의 단초는 정치사상사가 '역사'가 아닌 '사이비 역사 pseudo-history'로 기술되고 있다는, 역사학자로서 당연히 가질 수 있는 불만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기존의 정치사상사에 허다한 역사적 사실들이 잘못 기록되었음을 발견하고, 이러한 역사기술의 오류가 근원적으로 정치사상사가의 지나치게 철학적이고 현재적인 관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진단하였다.
단적인 예로 전통적 정치사상사에서 토머스 홉스 Thomas Hobbes를 해석하는 방식을 들 수 있다. 그의 저작 {리바이어던 Leviathan}은 지금까지 [정치공동체에 관하여 Of the Common-wealth]라는 제목이 붙은 제2장을 중심으로 논의가 전개되어 왔고, 제3장 [기독교적 정치공동체에 관하여 Of a Christian Common-wealth], 제4장 [어둠의 왕국에 관하여 Of the Kingdom of Darkness]는 홉스의 정치사상 논의에서 거의 무시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그 이유는 두말할 나위 없이 {리바이어던} 3, 4장의 비과학적이고 종교적인 언어 때문이다. 사가들은 근대 정치철학의 태조로 꼽히는 홉스가 {리바이어던}에 이러한 비근대적 담론을 포함시킨 이유를 그가 아직도 중세적 사고의 혼란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될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은 역사적 사실과는 전혀 거리가 멀다. 기독교적 예언과 종말론 eschatology은 홉스 당시에 아직도 유럽 지식인들이 정치에 관해 언급할 때 사용했던 개념적 수단 conceptual equipment의 핵심적 요소였으며 홉스 또한 이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가 의식의 혼란상태에서, 또는 마지못해 {리바이어던}의 후반부를 기술했고, 따라서 이를 무시하고도 ― 또는 무시해야만 ―그의 정치사상에 대한 논의가 가능하다는 주장은 전혀 잘못된 것이며, 오히려 {리바이어던}의 종말론은 그의 정치사상 연구에 핵심적 단서를 제공해 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홉스에 대한 이러한 잘못된 해석이 나오고 또 이것이 쉽게 사실로써 받아들여지는 이유는 그의 사상을 대하는 사가의 의도와 목적이 지극히 현실적이고 철학적이라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현대 정치철학자의 입장에서 볼 때 {리바이어던}의 후반부는 전혀 현재적 적실성 relevance을 갖지 못한다. 그러나 정치철학자는 어느 정도는 무의식적인 차원에서 이를 현재가 아닌 과거에까지 소급하여 {리바이어던}의 기독교적 종말론이 현재뿐 아니라 과거에도 적실성을 갖지 못하였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의 사상에 대한 철학적 관심이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고 이는 다시 해석의 왜곡을 가져오는 어떤 악순환적 요소가 여기에서 발견된다.
이와 비슷한 잘못은 전통적 정치사상사에서 그 예를 수없이 찾아볼 수 있다. 존 로크 John Locke의 사상은 반역사적 이성주의이며, 이것은 당시의 학문적 분위기가 전반적으로 그러했기 때문이라든지, 영미적 정치사상은 압도적으로 로크에서 비롯되는 자유주의적 전통에 서 있다든지 하는 주장 등이 그것이다.
사실들을 있었던 그대로 기록하는 것이 역사기술의 양보할 수 없는 대원칙이라고 한다면 ― 물론 이것이 가능한가라는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 있지만 일단은 접어두기로 하자 ― 정치사상사도 이러한 원칙에서 예외가 될 수는 없다. 역사적 사실을 도외시한 역사기술은 정당성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정치사상사도 하나의 역사임을 인정한다면 정치사상사가는 철학적이고 현재적인 목적에서 비롯되는 선입견들을 되도록 배제하고 과거의 정치사상을 '있었던 그대로' 밝히려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주장에 대하여 다음 두 가지의 즉각적인 반론이 제기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과거의 정치사상을 연구하는 목적을 고려할 때 이를 있었던 그대로 보는 것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느냐 하는 것이고, 둘째는 혹시 의미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가능한가 하는 것이다.
첫 번째의 반론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좀더 자세히 논구하겠지만,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역사학자의 입장에서 볼 때 이는 우문에 불과하다는 것이 스키너의 생각이다. 오히려 더욱 중요한 질문은 과거의 정치사상을 있었던 그대로 기술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고 과연 이를 가능하게 하는 방법이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선 이 점에 대한 스키너와 포칵의 이론을 살펴보기로 하자.

4  정치사상사 기술의 역사적 방법에 대한 분석
정치사상사의 역사학적 접근을 주창한 스키너와 포칵은 그들이 추구하는 방법들과 초점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을 '역사철학자'나 '역사이론가 theorists of history'가 아닌 '역사가 historians'로 지칭하는 데에서 가장 큰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그들이 정의하는 '역사가'는 역사적 사실의 탐구에 일차적 관심이 있다. 이에 비해 철학자는 어떤 "실용적인 practical ― 정치적·지식적·도덕적·종교적인 것까지도 포함하는 ― 목적") 때문에 과거에 관심을 갖는다. 정치사상사의 차원에서 말한다면 역사가는 하나의 역사적 저술을 있었던 그대로, 그 당시의 의미 그대로 읽고자 노력하는 데 반하여 철학자는 이를 '해석'하고자 한다. 역사가는 과거의 정치사상가들이 '그들의' 정치적 문제들에 관해 무엇을 말했는지에 관심이 있고, 철학자는 그들이 정치의 보편적perennial 문제들 ― 특별히 현대의 정치상황에 관계된 ― 에 대해 무엇을 말했는지에 관심이 있다. 한마디로 역사가의 관심은 역사를 '기술하는 to write' 것이고 철학자의 관심은 이를 '오늘에 경험하는 to live' 것이다.
과거의 정치사상을 있었던 그대로 기술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원론적으로 말해서 이것은 정치사상사 연구의 재료라고 할 수 있는 정치사상의 고전들을 하나의 '언어행위'로서 기술하는 것을 말하며, 이를 위해서는 다시 저술가의 저술내적 행위, 또는 저술의 의도된 발언수행적 힘 intended illocutionary force을 복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스키너의 주장이다.) 이 책에서 스키너가 자주 인용하는 한 가지 예를 든다면, 썰매 타는 사람에게 경찰관이 '그 곳은 얼음이 얇다'라고 말했을 때, 그의 발언에는 '경고'라는 발언수행적 힘이 의도되어 있으며, 이러한 발언자의 의도를 복구하는 것이야말로 그의 발언의 본뜻(역사적 의미)을 이해하는 열쇠라고 한다. 이 때 '의도'라 함은 개념적으로 발언 이전의 '동기'와 구별되며, 이러한 '발언내적' 의도의 차원에서 발언의 의미를 설명하는 것 또한 통상적으로 정치사상사가들이 해 왔던 '인과론적' 설명의 방식과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스키너는 강조한다.
여기에는 오스틴 J. L. Austin이 주창한 언어행위 이론의 몇 가지 난해한 개념들이 포함되어 있지만, 스키너는 주장하기를 이는 이론에 앞서 우리가 일상 영위하는 언어생활의 평범한 진리를 말한 것에 불과하다고 한다. 일상에서 행해지는 발언의 의미는 그 발언이 수행하는 언어행위와 이에 관한 화자의 의도를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다. 저술이라는 것도 결국은 언어행위의 한 형태이므로 저술의 원래적 의미를 밝힌다는 것은 그 저술의 언어행위, 곧 저자가 이를 통해서 무엇을 하려 했고 무엇을 성취했는가 하는 것을 밝히는 것이다. 이것이 곧 과거의 정치사상에 대한 역사학적 연구의 본질이다.
그렇다면 저술의 언어행위, 곧 저자의 발언수행적 의도는 어떻게 찾을 수 있는 것일까? 한 가지 사실, 곧 "저술 자체를 읽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일상적 언어생활의 예에서 보더라도 발언의 언어적 행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발언의 언어적 의미뿐만이 아닌, 발언을 둘러싼 어떤 '상황'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넓은 의미에서 우리는 이를 발언의 콘텍스트 context라 부른다.
콘텍스트는 정치사상사의 역사적 연구방법에서 핵심적인 중요성을 가지는 단어이다. 사실 과거의 어떤 정치사상을 이해하기 위해 이의 '콘텍스트'를 고려해야 한다는 주장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다만 기존의 연구에서 콘텍스트가 주로 사상가의 개인적·사회적 배경이나 시대상황의 차원에서 이해되었다면 역사학자들이 말하는 콘텍스트는 압도적으로 저술을 둘러싼 언어적 관습과 관련된 것이다. 여기에는 좁은 의미의 문법뿐만이 아니라 언어의 사용을 둘러싼 사회적 신념과 가치체계 등이 포함된다.) Skinner의 말을 빌리면 다음과 같다.

…… 저술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저자의 의도를 알아낼 필요가 있다. …… 동시에 저자의 의도는 그의 저술의 콘텍스트를 이루고 있는 여러 가정들과 관습들로부터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이러한 여러 가정들과 관습들에 대한 지식이 특정 저술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라고 우리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여기에서 스키너가 콘텍스트와 관련하여 말하고 있는 "여러 가정들과 관습들"은 구체적으로 무엇인? "대화의 패턴, 장면 등"도 있고 "유행하는 장르와 문체", "가치체계 ……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가설, 신념, 태도", "어휘적 의미, 관용구, 숙어", "사고체계") 등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언어적 관습, 다시 말해 "공통의 어휘, 원칙, 가설, 진리판단의 기준, 문제, 개념의 구분체계 등 여러 저술들을 하나로 묶는 언어적 습관"이다.) 특히 스키너가 강조하는 것은 가치나 개념을 지칭하는 "규범적 normative" 단어들이다. 이러한 단어들은 보통 "지배적 사회계층의 행위와 태도들을 기술하면서 동시에 이를 정당화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어떤 시대나 장소를 막론하고 규범적 어휘들을 둘러싼 논쟁은 지식적 논쟁이면서 동시에 정치적 논쟁이다. 언어에 관한 의견 불일치는 곧 "사회적 세계 자체에 대한 의견 불일치")이기 때문이다. 정치사상가에 있어 규범적 어휘들이 가지는 중요성을 스키너는 이렇게 말한다.

흔히 말하기를 화자가 무엇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그가 하는 것을 가장 잘 기술할 수 있는 그런 원칙들이 도덕적으로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말하기만 하면 된다고 한다. …… 그러나 이는 정치를 기술하고 평가하는 데 한 사회가 채택하고 있는 규범적 어휘의 기능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 누구든 자신의 행위가 권위적으로 받아들여지기를 바란다면 그가 취할 수 있는 행동의 반경은 (규범적 어휘에 의해) 어떤 정해진 범위를 벗어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자신의 행위를 …… 정당화할 때 행위자가 풀어야 할 문제는 자신의 목적에 맞도록 규범적 어휘를 기계적으로 뜯어 맞추는 것이 아니고 목적을 어휘에 맞도록 조절하는 일이다. 이는 다시 말해 한 행위자가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그가 속한 사회의 규범적 어휘체계를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나 언어의 요소가 이처럼 중요하다고는 하지만 언어가 콘텍스트의 전부는 물론 아니다. 콘텍스트는 한두 개의 요소만으로 제한되어서는 안 되며 저술의 원래의 의미를 알기 위해 살펴보아야 하는 모든 요소들, 가장 일반적으로 말해서 "한 사회의 여러 특징들")을 모두 포함한다.
스키너가 콘텍스트를 되도록이면 넓게 정의하려고 하는 이유는, 아마도, 모든 역사적 저술은 각자만의 콘텍스트를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어떤 공통적 콘텍스트를 말한다는 것은 역사적 저술들을 비역사화할 위험이 있다고 보기 때문일 것이다. 특정 저술의 콘텍스트가 무엇인지는 미리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하나 하나 독자적으로 판단되어야 한다. 여기에는 역사가의 역사적 지식과 독창적 사고가 무엇보다도 큰 역할을 한다. 그러나 보통의 역사가가 어떤 저술의 타당한 콘텍스트를 찾는 것은 그 저술이 씌어진 장소와 시대의 모든 역사적 상황― 언어적 상황을 포함하는 ― 을 광범위하게 고찰하지 않으면 안 되는 매우 고통스런 작업이 될 것임에 틀림없다.
스키너에 비해 포칵은 콘텍스트로서의 언어적 요소를 압도적으로 중시한다.) 그러나 포칵이 언어라고 할 때 이것은 스키너가 말하는 규범적 어휘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포칵이 정의하는 정치언어 political languages란 한 사회에서 통용되는, 정치적 태도와 가치들을 암시하고 정치적 권위의 분배와 관계되는 특별한 "관용구, 비유법, 어휘와 문법체계, 정치에 대한 담론(談論)의 형태들")을 말한다. 현대 서구정치학은 현재 범세계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대표적 정치언어이지만, 정치언어는 시대와 장소에 따라 그 어휘와 문법체계가 현저히 달랐다. 중세 스콜라 철학, 르네상스 미학, 성서주석학(聖書註釋學), 영국 관습법, 시민법, 고전적 공화주의, 공동체적 급진주의 등은 서구 정치사상사에서 나타나는 정치언어의 주요한 예들이다. 고대 중국에서의 시학이나, 주자학, 양명학, 고증학 같은 유학의 주요 전통들도 정치언어로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때로는 비언어적 정치언어도 있을 수 있는데, 예를 들어 유교사회에서의 예(禮)와 같은 것이다.
포칵에 의하면 각 사회에는 이같은 독특한 정치언어의 체계뿐 아니라 그것이 정치언어로서 기능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사회구성원들간의 묵시적·전통적 합의가 존재한다. 이것은 우리가 어떤 논리적 법칙으로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그런 성질의 것이다. 예를 들어 고대 중국에서 시(詩)의 형태에 관한 담론은 당사자들에게 그 자체로서 정치적 제도, 가치 그리고 정치적 권위의 배분에 관한 특정한 태도를 표명하는 것으로 이해되었으며, 이것은 플라톤이 시(詩)의 형태와 국가의 정체(政體) 사이에 어떤 관련이 있음을 밝히기 위해 개인적 심성과 사회구조의 상관관계에 대한 복잡한 이론을 필요로 했던 것과는 사뭇 다르다.)
이처럼 각 사회에는 정치언어의 형태,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기능하는지에 대한 구성원들간의 합의가 존재하는데, 포칵은 이를 언어게임 language games의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다. 즉 한 사회의 정치담론 political discourse을 사회적으로 정해진 규칙에 따라 담론의 당사자들간에 벌어지는 일종의 언어적 게임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그가 게임이라는 어휘를 사용한 것은 담론의 유희적 성격을 말하려는 것이라기보다는 게임의 규칙성 ― 즉 게임에는 규칙이 있다는 ― 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정치언어의 게임은 그 결과가 당사자들의 정치적 권위분배에 영향을 미치며 그렇기 때문에 단순한 말의 유희가 될 수는 없다.
정치담론이 일종의 언어게임이라면 거기에는 게임의 당사자들이 지켜야 하는 규칙들이 있게 될 것이다. 이 규칙은 우선 정치언어 패러다임의 설정에 관계되고, 다음으로는 그 언어체계 내에서 사용되는 어휘와 문법, 그리고 어휘의 의미를 규정한다. 규칙이 없는 게임은 생각할 수 없듯이 정치언어 게임의 이러한 규칙들이 없으면 의미있는 정치담론은 있을 수가 없을 것이다. 이 규칙들은 보통 그 사회의 오랜 정치적 전통에서 생겨난 것이기 때문에 담론의 당사자들이 임의로 바꿀 수 없고, 따라서 그들에게는 언어행위의 제한요소로 작용한다. 동시에 이 규칙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보통은 어느 정도 융통성이 있게 마련이고 이를 정의하는 것 자체가 게임의 한 부분이다. 포칵의 말을 빌리면: (한 사회에는) 정치적 담론의 세계와 그 안에서 우리의 역할을 규정하는 하나의 우세한 언어 구조가 존재한다. 그것은 우리의 동의 여부와는 상관이 없고 그래서 자주 억압적이다. 그러나 그러한 언어의 언저리와 숨겨진 뿌리에는 언제나 애매모호함, 불합리성, 그리고 모순의 비옥한 땅이 있어 우리의 손길을 기다린다. 이러한 것들을 이용하여, 그리고 언어행위speech-acts와 다른 대화의 행위들 그리고 자체로서 대화로 여겨지는 다른 행위들을 통해, 우리는 우리에게 지워진 삶의 정형(定型)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키고자 한다. 우리는 언어에 조화되기는 하지만 예측은 할 수 없는 그러한 방식으로 행동한다. 역할을 바꿔 보기도 하고 모순과 부정을 폭로하기도 한다. …… 해방자로서의 광대의 이미지가 이런 것이다.)

한 사회의 정치언어는 어떤 점에서 사상가에게 억압적으로 작용하지만 동시에 그에게는 자기표현의 수단이 된다. 또한 한 사회의 정치언어는 그 안에 사는 사상가의 개인적 의도에 앞선다. 왜냐하면 "그가 무엇인가를 말하는 데 사용할 수 있는 수단이 무엇인지를 이해한 다음에야 비로소 우리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그의 말이 성공적인지 아닌지, 그가 무슨 말을 한다고 사람들이 생각했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한 사상가의 의도를 알기 위해서는 "그의 언어의 세계"를 찾아내어 그것이 "패러다임적으로 어떻게 작용하여 그의 발언의 종류와 양태를 제한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지 않으면 안 된다.) 예를 들어, 그가 사는 사회가 정치에 관해 말할 때 통상적으로 사용하는, 문화적 기원이나 언어적 기능이 다른 여러 관용구들을 먼저 찾아낸다. 그러면 그가 이 중에서 어떤 것을 취하고 어떤 것을 비판하고 있는지 …… 그들이 수행하는 정치적·지식적 기능이 무엇인지, 어떤 가정과 암시들이 그들에 내포되어 있는지 …… 하는 것 등을 알아내는 것은 비교적 쉬운 일이다. 그 다음에야 비로소 우리는 그가 그만의 방식으로 이러한 관용구들을 사용한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 것인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포칵이 이처럼 주로 정치언어의 차원에서 콘텍스트를 말하는 데 대해서는 여러 가지 반론이 제기될 수 있을 것이다. 스키너조차도 과연 한 저자의 의도가 그의 정치언어로만 설명될 수 있는 것인지를 묻고 있는데, 그러나 이는 포칵이 정치사상을 압도적으로 언어행위의 차원에서 인식하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본다. 그가 상상하는 정치사상가는 주어진 정치언어의 세계에서 어떻게 자신의 행위의도를 설정하고 역으로 이를 달성하기 위해 어떻게 언어를 구사할 것인가에 관심을 집중시킨다. 이에 비해 스키너의 정치사상가는 문체나 표현양식 따위의 '사소한' 언어적 측면보다는 사상적 행위의 총체적 콘텍스트, 좀더 구체적으로는 시대적 이데올로기의 흐름과 이를 대변하는 규범적 어휘들에 관심을 갖는다.
그러나 정치사상가의 주된 관심과 사상의 차원에 대한 스키너와 포칵의 이같이 서로 다른 이미지는 사실 서로 배치된다기보다는 상호보완적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다시 말해 정치사상의 언어행위는 포칵의 '미시적' 행위와 스키너의 '거시적' 행위를 모두 포함하고 있으며 이들의 차이는 결국 정치사상적 언어행위의 어떤 측면을 강조하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정치사상가와 정치사상의 역사에 대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느냐에 따라 이들의 방법은 서로 장단점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스키너는 정치사상의 기본적 콘텍스트로서 각 시대를 관통하는 어떤 이데올로기적 흐름이 있다고 말한다. 그의 연구의 초점은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흐름의 실체를 파악하고 각 사상의 지류들이 어떻게 이 거대한 흐름의 생성과 방향에 관계되는지를 밝히는 데 있다. 이 점에 대해 그는 {근대 정치사상의 기초 The Foundations of Modern Political Thought}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가 이 책에서 기술하고자 하는 역사는 저작들보다는 이데올로기의 역사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왜냐하면 이런 테두리를 알아야만 여러 정치사상가들의 저술들을 비로소 올바로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연 이데올로기가 역사적 실체를 가지고 있느냐 하는 어려운 문제가 있다. 많은 학자들은 스키너가 {근대 정치사상의 기초}에서 주장하고 있듯이 16세기 유럽에는 공화주의와 저항의 이론이라고 하는 두 개의 이데올로기적 흐름이 있어 이것이 나중에 국가라는 근대 정치사상의 큰 물줄기를 형성했다고 보지 않는다. 케네스 미노그 같은 이는 스키너가 정치사상사 연구의 비역사성을 극복해야 한다고 하면서도 실제로 그가 {근대 정치사상의 기초}에서 보여준 것은 "국가의 근대적 개념"이라고 하는 "비역사적 무엇 unhistorical something일 뿐"이라고 말하는데,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비판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포칵의 이론은 미시적이기는 하나 실체의 파악이 좀더 용이한 정치사상사 기술의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말할 수 있다. 포칵은 이데올로기의 역사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우리가 역사에서 관찰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의식이나 이데올로기가 아닌 이데올로기의 언어일 뿐이다. 정치사상이라고 하는 것은 보통 한 사회의 정치적 상황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 상황과 언어 사이에 긴장상태 ― 포칵이 위기 crisis라 부르는 ― 가 초래될 때 존재하게 되는 현상으로, 정치사상사란 사상가들이 이러한 긴장 상태를 해소하기 위해 "언어적 패러다임을 바꾸고 새로운 언어적 패러다임을 탐구하는 역사"이다.)
{마키아벨리적 전환 The Machiavellian Moment}은 정치언어의 역사라는 관점에서 근대 서구 정치사상사를 다시 기술한 그의 대표적 업적이다. 그가 그 책에서 말하는 정치사상사 연구는 "여러 정치체제들의 특수성을 논하는 데 사용된 개념적 어휘체계들을 찾아내어, 이들이 어떤 한계와 시사를 가지고 있었는가, 그 한계와 시사는 어떻게 기능했는가를 탐구하고, 이러한 개념적 체계들, 그들의 용례, 그리고 시사하는 바가 시간 속에서 어떤 과정을 통해 변화했는지를 고찰하는") 행위이다. 구체적으로 그가 {마키아벨리적 전환}에서 다루는 '개념적 어휘체계'는 아리스토텔레스적 공화주의 이론이다. 동서에서 그는 르네상스 시대 시민적 인본주의자들에 의해 부활된 아리스토텔레스의 공화주의 이론이 마키아벨리 시대의 피렌체, 17세기 시민전쟁 당시의 영국, 그리고 독립전쟁 시대의 미국으로 '장소'를 옮겨가면서 각각의 정치적 상황을 규정하고 이의 물줄기를 형성하는 데 어떤 역할을 수행했는지를 추적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공화주의는 그것이 시사하는 정치체의 구조와 권력의 배분에서 어떤 핵심적 요소가 분명히 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이의 구체적 표현은 그것이 적용되는 개개의 정치적 상황에 좌우된다. 예를 들어 마키아벨리의 피렌체에서는 시민의 정치적 행동원리로, 해링턴 Harrington의 영국에서는 토지분배와 상업의 원리로, 그리고 매디슨 Madison의 미국에서는 정치의 타락을 방지하기 위한 헌법의 원리로 공화주의가 원용되었다. 뿐만 아니라 각각의 정치상황, 그리고 경쟁관계에 있는 다른 정치언어들과의 게임의 역학관계 속에서 공화주의의 개념적 체계와 이의 용례가 또한 바뀌어 갔다고 하는 것이다.
'공화주의의 역사'는 그러나 서양정치사상사의 여러 물줄기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포칵의 견해에 따르면 정치사상사에 관한 역사학적 작업의 일차적 목표는 '정치사상사'라는 허구적 개념에 함몰되어 온 정치언어적 역사의 물줄기들을 찾아내는 일이다. 이들을 묶어 좀더 거시적 차원에서의 대역사 grand history를 기술하는 것은 아마도 철학자들의 몫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 철학자들이 쓰는 '대역사'는 사이비 역사 pseudo-history로 전락할 가능성이 크다. 역사로서의 대역사 기술은 아마도 스키너적 방법에서 그 가능성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의 {근대 사상의 기초}는, 비록 그가 가정하는 이데올로기의 역사적 실체를 규명하는 어려운 문제가 남아 있기는 하나, 좀더 역사적 사실에 충실한 대역사 기술의 시험적 업적으로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본다.

5  평가 및 결론
지금까지 정치사상사의 역사적 연구가 태동하게 된 배경, 이의 시각과 방법, 그리고 정치사상사 기술에서 이의 구체적 적용례 등을 살펴보았다. 스키너와 포칵의 역사적 연구방법은 정치사상사 연구에 현실적 목적과 철학적 방법을 당연시해 왔던 기존의 학문적 전통에 일대 혁명을 몰고 왔으며, 나아가 사상의 담론적 성격에 대한 이들의 관심은 80년대 들어 정치사상사 연구에 또 한번의 '언어적 전환Linguistic Turn'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들의 방법론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이론적이거나 혹 실무 역사가의 차원에서 많은 비판이 제기되어 왔다. 이 책에 기고된 여러 비판 논문들이 이의 주요 내용들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지만, 이 책에서도 자주 언급되는 거넬 Gunnel이나 라카프라 LaCapra의 글이 실리지 않은 점은 못내 아쉽다.
이 중 비교적 순수이론적 차원에서의 비판론, 예를 들어 스키너의 의도론적 설명이 비원인적 설명으로 간주될 수 있는지의 여부, 의도와 동기의 명확한 개념적 구분이 가능한지의 여부, '동기'의 고찰이 없이 저술의 완전한 설명이 가능한지의 여부, 발언수행적 재기술을 설명의 한 형태로 간주할 수 있을지의 여부, 마지막으로 역사가가 역사를 이해하는 데 가다머 Gadamer가 말하는 이른바 '현재의 지평'을 초월할 수 있는지의 여부 등은 나름대로 흥미있고 적실한 비판의 시각인 것은 사실이지만, 여기에 대해서는 스키너가 충분한 반론을 펴고 있고 또한 그의 주장이 기본적으로 옳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점들에 대해서는 이 책을 일독하는 것으로 충분한 이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입장에서 스키너의 방법론에 대한 가장 절실한 비판은 현재적 관심을 배제한 역사 탐구가 과연 무슨 의미를 가지느냐 하는 것이다. 이 책에서는 페미아 Joseph Femia가 이러한 맥락에서의 비판을 가장 직접적으로 제기하고 있다.
스키너의 강력한 변론에도 불구하고 '철학'이 아닌 '역사'로서의 정치사상사를 기술한다는 것이 역사학자의 학문적 호기심을 충족시켜 주는 외에 우리의 입장에서 어떤 중요한 의미가 있느냐는 의문을 완전히 떨쳐버리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과거의 정치사상에 대한 관심이 궁극적으로 어떤 현실적이고 현재적인 문제의식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고 또 이에 직접적인 해답을 주어야 한다는 인식은 우리의 정치적 현실에서 당연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필자 역시 과거의 정치사상에 대한 연구가 현재적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지 않을 수는 있으나, 이의 기술이 어떤 차원에서든 전혀 현재적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면 그 의미는 크게 줄어들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스키너 같은 '한가한 역사학자'의 "골동품 수집가적 호기심" antiquarian curiousity이 좀더 급박한 학문적 요구와 정치철학자로서의 의무를 부여받은 정치사상사가의 주된 관심이 될 수는 없다는 비판은 이론적 차원을 떠나 많은 사람들에게 즉각적인 호소력을 가진다. 이에 대해 역사학자들은 어떤 답변을 제시하는가? 우선 이들은 역사를 보는 역사학자의 시각과 정치철학자의 시각이 본질적으로 다를 수 있으며 또한 이들의 역사기술이 상호배타적 영역에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한다. 역사학자의 관심은 일차적으로 역사적 사실 그 자체이다. 철학자는 역사의 현재적 의미에 관심이 있다. 정치철학자가 과거의 정치사상에서 어떤 철학적이고 현재적인 의미를 찾아내든 이것은 그의 고유권한에 속한다. 이의 과정에서 설령 역사적 사실이 왜곡되어 있다 해도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로서 주장하지만 않는다면 ― 이것은 철학자가 역사학자의 영역에 부당하게 간섭하는 것이 된다 ― 역사학자는 원칙적으로 철학자의 지적 활동에 간섭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다고 하면 역사학자의 요구란 결국 좀더 엄격한 분업에의 요구일 뿐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현실적으로 철학자와 역사학자의 학문적 분업의 경계선이 명확하게 그어질 수 없다는 데 있다. 가령 역사학자가 발굴해 낸 역사적 사실들이 아무리 '골동품'에 불과하게 보일지라도 이 골동품은 관찰자에게 현재의 미적 감각에 대한 어떤 비평적 시사를 던져줄 수가 있을 것이다. 골동품의 조잡함이 미적 가치기준의 역사적 진보에 대한 그의 믿음을 강화시켜 줄 수도 있고, 반대로 거기에서 예기치 않게 발견된 어떤 우아함의 요소가 그의 그러한 믿음을 흔들어 놓을 수도 있다. 역사적 사실들은 이처럼 '그 자체로서' 역사가에게 어떤 현재적 의미를 발산하며, 역사가라고 해서 이처럼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역사의 현재적 의미조차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바로 여기에서 역사가는 '골동품 수집가'의 영역을 벗어나 '철학자'의 영역에 들어서게 된다.
역사학자의 전통적 정치사상사에 대한 비판이 단순한 분업에의 요구를 넘어 좀더 적극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은 이처럼 그가 정치사상사가의 전통적 영역에 들어가 그의 학문적 시각과 방법을 비판하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가는 역사의 진정한 의미는 역사가 '스스로' 현재에 대해 말하도록 하는 데 있지 이를 '강제'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철학자는 과거가 어떻게 현재와 같아질 수 있는지를 밝힘으로써 역사의 의미를 찾고자 하지만, 역사가는 이것은 역사를 보는 하나의 빈곤한 시각일 뿐이며, 오히려 역사의 의미는 과거가 현재와 어떻게 다른가, 과거가 어떤 과정을 통해 현재로 되었는가를 밝히는 데 있다고 한다.) 홉스의 정치사상은 그를 "현대 정치철학자의 한 사람으로" 개조하고 그의 사상을 "현대 (정치)철학의 용어들로") 재구성함으로써가 아니고, 오히려 이의 원래적 용어와 사상 뒤에 숨어 있는 저자의 의도를 회복함으로써 더욱 풍부한 현재적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역사로서의 정치사상사 기술은 분명 현재의 정치적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한 것이 일차적인 목적은 아니다. 그렇다고 하여도 비록 의도적이지는 않지만 이것이 전혀 현재적 의미를 가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현재의 정치사상적 논쟁이 언제나 과거의 정치사상을 근거로 하는 한 역사학자들이 발굴해 낸 과거 정치사상의 역사적 사실들은 논쟁의 당사자들에게 언제나 무시할 수 없는 무게로 다가올 것이다.
문제는 역사가 스스로 말하도록 기다릴 수 있을 만큼 우리에게 '여유'가 있느냐 하는 점이다. 이 책에서 키인 John Keane이 주장하듯 위기의 때에는 역사의 현재적 의미가 강조되는 대신 과거는 그저 과거일 뿐이라는 신념이 약화된다. 정치사상사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리의 정치적 현실(정치적 위기상황의 지속)이나 학문적 현실(단기 업적주의)을 고려할 때, 겹겹이 쌓인 콘텍스트의 지층을 발굴하여 역사적 사실의 단편들을 주워 모으려는 역사학자들의 시도는 결국 한가한 골동품 수집가적 호기심으로 보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여기에 스키너나 포칵의 방법론이 암시적으로 정치적 보수주의를 지향하고 있다는 사실(이는 스키너도 인정하고 있는 바이다) 또한 우리의 관심을 이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또 다른 이유가 된다.
그러나 우리의 정치상황이 위기에 처해 있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더욱 엄격한 역사학자적 관점에서 서양과 우리의 정치사상사를 다시 보아야만 하는 절박하고 현실적인 이유가 한 가지 있다고 생각한다. 곧 지금 우리의 정치사상적 또는 정치적 논의는 어떤 의미에서 홉스적 무정부 상태에 놓여 있고,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단서를 바로 정치사상사의 역사적 연구에서 찾을 수 있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
무릇 어느 사회에서든 정치적 논쟁이 의미와 방향을 가지기 위해서는 정치언어의 의미, 다시 말해 언어적 가정, 가설, 용례, 진리판단의 준거, 그리고 그것이 암시하는 정치적 제도와 정치적 행위에 대한 사회적 합의 ― 포칵이 말하는 정치언어적 게임의 규칙 ― 가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합의로써 언어와 의식, 행동, 그리고 제도가 조화될 수 있을 때 우리는 일반적으로 그 정치체제를 안정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혹자는 한국정치는 아직도 서구에서 전파된 정치의 개념체계와 제도가 아직도 우리에게 뿌리깊이 남아 있는 전통적 정치의식과 행동에 괴리됨으로써 야기된 일종의 무정부 상태에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곧 넓은 의미에서의 정치언어적 혼란이며, 홉스가 말하는 자연상태의 본질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홉스의 자연상태는 본질적으로 언어의 혼란에서 기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언어의 혼란은 대화의 불가능을 초래하며 이로부터 가치체계의 도괴, 타락, 불안정, 무자비한 힘에의 동경 같은 정치적 해악이 유발된다. 한국정치의 문제는 본질적으로 이러한 정치의 언어적 혼란을 극복하는 문제이다.
물론 우리는 이를 '리바이어던'에 맡길 수는 없다. 정치언어를 떠받치는 의식과 행동은 그 어떤 엄청난 폭력에 의해서도 하루 아침에 만들어지거나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가령 그럴 수 있다 해도 우리는 그러한 독재를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정치언어적 의미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시일을 요하는 일이다.
분명한 것은 그러한 합의에 앞서 우선은 논의의 대상이 될 만한 바람직한 정치언어의 의미들이 제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기본적으로 정치사상가나 정치철학자들이 할 일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해 왔듯이 언어를 분석철학적으로 탐구하여 이의 보편타당한 의미를 규정하려는 것은 헛된 노력에 불과하며 오히려 의미의 혼란을 가중시킬 뿐이다. 언어는 언제나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차원에서 의미가 규정될 수밖에 없음을 스키너는 반복 강조하고 있다.
정치언어의 혼란을 극복하기 위해 정치사상가가 해야 할 일차적 과제는, 그러므로, 언어의 혼란된 의미를 '해체'하여 이것이 우리와 서양의 정치사상사에서 어떤 '계보'에 있는지를 밝히는 일이다. 이것이 바로 정치사상사의 역사적 연구가 지향하는 바이고 우리가 이에 관심을 가져야만 할 현재적이고 현실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다만 이러한 목적에서 우리와 서양의 정치사상사를 다시 쓰고자 할 때 스키너나 포칵이 제시하는 역사적 연구의 방법들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지는 필자나 관심있는 학자들이 수행해야 할 앞으로의 학문적 과제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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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관계사 I (김한규 지음) 1999-4-20, 2002년 "학술원 선정 우수학술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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